고령군 580년 전, 조선시대 “하며리 자기소”드디어 찾아내다!『세종실록지리지』의 경상도 고령현의 상품자기소 중 하나로 확인
[프레스경북=이성열기자] 고령 사전리 도요지의 발굴조사에서는 15세기의 대형의 자기가마 1기와 폐기장, 풍수지리와 관련된 조산(祖山)이 확인되었다. 자기가마의 조업은 늦어도 1420년에 시작되었고, 1469년 이후 어느 시점까지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으며, 조산은 1600년 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하며리 자기소(下旀里 磁器所)’의 실체를 확인하다 사전리 도요지는 1469년(예종 1)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의 “磁器所 在縣南 下旀里 品下”에 기록된 ‘하며리 자기소’ 중의 하나로 보이며, 남서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어리미골에도 도요지 1개소가 있다. 그리고 기록 당시에는 하품을 생산한 것으로 보이나 이전 시기에는 왕실에 공납하던 고급 분청사기와 백자를 생산한 것이 확인되어 상품 · 중품 · 하품이 모두 생산된 자기소로 판단된다. • 경상도에서 가장 완벽한 구조이자 최대 규모의 가마 발견하다 사전리 도요지는 요전부→아궁이→연소실→소성실→초벌실→연도부 순의 구조로 조업 당시의 완벽한 가마모습을 갖추고있다. 내부에는 연소실의 불턱, 소성실의 측면출입구 6개소와 불기둥, 초벌실의 격벽, 완벽한 연도부 등이 잘 남아있다. 조업횟수는 최초 가마(1차)의 벽체 내측과 바닥 위로 2겹의 수리부분이 확인되어 적어도 2차례(2 · 3차) 이상 개보축했음이 밝혀졌다. 특히, 가마의 전체 길이는 31.4m(평면 30m) 정도로 현재까지 조사된 경상도 지역의 가마 중에 가장 큰 규모이다. 폐기장 역시 높이 1, 2m 정도, 직경 50m 이상의 거대 규모로 수십만 점 이상의 유물과 폐기물들이 쌓여 있다. • 『세종실록지리지』의 경상도 고령현의 상품자기소 중 하나로 확인되다 사전리 도요지에서는 많은 양의 자기편이 출토되었는데, 분청사기의 흑백상감 장식기법, 인화문의 내용, ‘十 · 大 · 夫 · 果 · 仁壽’가 새겨진 명문자기, 백자와 상감백자, 다량의 갑발 등이 조선시대 15세기의 공납자기를 생산하던 요장임을 잘 보여준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粉靑沙器 象嵌雲龍文 立壺)와 동일한 모티브의 분청사기 호편이 출토되어 이의 생산처로 주목된다. 이런 고급 분청사기와 백자의 생산가마인 점으로 미루어 사적으로 지정된 고령 사부동과 기산동 요지와 함께『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경상도 고령현에서 왕실에 공납하던 상품자기소 중 하나로 판단된다. • 조선왕실에 공납한 증거품 ‘인수(仁壽)’명문자기 고령지역 최초로 출토되다 조선시대 문헌인『점필재집』에는 왕실에 공납한 기록이 보이고,『용재총화』에는 고령자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자기소는『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지리지』,『경상도속찬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토산조에 기록되어 있다. 이번 발굴조사의 출토품 중에는 내면에 ‘인수(仁壽)’가 새겨진 명문 1점이 출토되어 고령자기가 조선왕실에 공납되었음을 유물로서 잘 보여준다. 이 명문은 인수부(仁壽府)를 지칭하는 관사명으로 정종(定宗)이 왕세자인 태종(太宗)을 위하여 1400년에 설치한 부서이나 왕실의 어고를 담당한 것은 세종 즉위(1418년) 8월 15일부터이다. 따라서 ‘인수부’명 자기는 1418년 8월에서 1455년 윤 6월 사이와 1457년 6월에서 1464년 2월까지 제작된 자기들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고령에서 제작된 ‘인수부’명 도자기는 일본 도쿄의 세이카도분코미술관(静嘉堂文庫美術館)에 ‘高靈仁壽府’명 분청사기 호(병) 1점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 고령지역에서 출토된 사례는 이번이 최초이다. 그 외 고령지역에서 왕실 공납 증거로 관사명이 확인된 유물은 ‘고령 사부동과 기산동 요지(사적)’에서 사선서(司膳署)와 관련된 ‘司 · 膳’ 명문이 출토된 바 있다. •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가 발명한 구사지법(九篩之法) 백사기를 굽던 가마가 아닐까? 조선시대 고령의 대표 학자인 김종직이 저술한『점필재집』에는 아버지 김숙자(1389-1456)의 언행 기록인'이존록'(1497년 간행)에 고령자기의 우수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기록은 김숙자가 고령현감(1442-1447년)으로 부임하여 고령에서 매년 진공하는 백사기(白沙器)를 만드는 공인들에게 아홉 번 체질하는 법[九篩之法]을 가르친 결과, 경기도 광주(廣州)나 전라도 남원(南原)보다 품질이 좋아져 상을 받았으며, 김종서(1383-1453)가 도순찰사로 고령에 와서 백사기가 뛰어남을 여러 차례 말하고 한양에 되돌아가서도 누차 언급했다는 내용이다. 이번에 조사한 가마의 주생산품은 분청사기이지만 소량이나 상감백자 등 고급백자도 함께 생산했다. 운영시기는 분청사기의 문양이 주름문과 국화문이 대부분이며, 귀얄기법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 특징으로 보아 1420년 이전에 조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마는 고급 분청사기와 백자를 생산하던 가마이며, 조업시기가 김숙자가 고령현감으로 재직하던 시기와 겹치므로『점필재집』의 기록에 나오는 백사기를 생산하던 가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조선시대 풍수지리에 따라 조산(祖山)을 축조하다 가마의 동쪽에는 높고 길쭉한 언덕이 위치하는데, 규모는 길이 40m, 너비 10m, 높이 1m에서 7m 정도로 가마의 폐기물들이 높게 쌓여 있어 조사 이전에는 가마의 흔적으로 보았다. 마을 주민들은 이 언덕을 풍수지리의 명당과 관련하여 쌓은 조산(祖山)으로 알고 있다. 산의 소유주인 고령박씨 낙낙종중의 박달규(前고령향교 전교, 성균관 부관장)씨의 전언에 따르면, 문중에서도 조산의 조성시기에 대해 검토한 바 있는데, 족보에 광해군 때 도승지를 역임한 박종주(朴宗冑, 1591-1623년)가 “청룡등이 약하다”고 표현한 바 있어 그의 생전인 1600년 대 초 즈음에 풍수사상에 근거하여 이 조산을 쌓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이 조산 역시 조선시대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양반가문에서 많은 공력을 들여 축조한 중요 유적으로 우리나라 풍수지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고령군에서는 사전리 도요지에 담겨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재조명하기 위해 향후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자기소의 실체파악을 위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나아가 경상북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할 계획이다. <저작권자 ⓒ 프레스경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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